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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암행어사의 126일간의 비밀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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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3-15 10:39 조회 1,01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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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암행어사의 126일간의 비밀 여행기

- 박래겸의 서수일기에 담긴 19세기 조선의 진풍경

글 박동욱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 교수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관리들의 비리를 살피는 임금의 눈과 귀, 암행어사. 1822년 봄, 43세의 박래겸은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126일간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홍문관 부교리였던 그는 사목책 한 권, 마패 하나, 유척 두 개를 하사받고, 12명의 수행원과 함께 은밀한 출장을 떠났다. 그가 남긴 서수일기는 조선 후기 지방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고단했던 변장의 나날들

암행어사의 가장 큰 과제는 신분을 숨기는 일이다. 박래겸은 일행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이동했고, 자신도 철저히 행색을 감췄다. 하지만 완벽한 변장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역졸들은 그가 탄 말을 보고 의심했고, 뱃사공들은 끊임없이 그의 신분을 캐물었다.

특히 난처했던 것은 지역 관리들과의 만남이었다. 옛 친구가 수령으로 있는 고을을 지날 때면 만남 자체를 피해야 했고,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한번은 읍교의 아전들이 그를 의심하여 미행하다가 철삭(죄인을 묶는 쇠사슬)을 보여주며 위협하기도 했다. 위기일발의 순간, 박래겸이 마패를 꺼내 보이자 그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

기녀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피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41세의 퇴기 빙심은 "30년간 화류계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아 왔다"며 그의 초라한 차림에도 범상치 않은 기품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당대 최고의 명기로 꼽히던 김운초 예명 부용은 시문과 산수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정체를 은근히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들이 모두 헛된 것은 아니었다. 기생들은 각 지역의 소문과 실정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었고, 그들과의 대화는 지역 사정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사또가 온다!" - 민심의 목소리를 듣다

어느 날 비를 피해 들른 시골집에서 박래겸은 특별한 장면을 목격했다. 할머니가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며 "울지 마라, 어사가 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그 이유를 물어보자 할머니는 놀라운 답을 들려주었다.

요즘 어사가 암행한다는 소문에 관리들이 덜덜 떨고 있어요. 이 마을 관리들이 모두 혼비백산해서 밖에도 못 나온다네요. 어사가 평생 돌아다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힘없는 백성들도 살 수 있을 텐데..."

이 일화는 암행어사의 존재만으로도 부정한 관리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박래겸은 관청의 창고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쌀이 질이 나쁜 것을 목격했는데, 백성들이 항의하자 아전들은 오히려 비아냥거리며 하소연할 길을 막았다.

"근자에 암행어사가 내려온다고 하는 데도 당신들은 이처럼 간사한 짓을 하는가? 이미 질 나쁜 곡식을 주고 또 하소연할 길조차 막으니,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오?"

백성들의 절규에도 아전들은 암행어사가 이 마당 안에 들어오지 않을 줄을 어찌 알고 이처럼 시끄럽게 구느냐"며 오히려 협박했다. 눈앞의 사내가 바로 그 암행어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박래겸은 평안도 곳곳을 다니며 지역의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도 힘썼다. 개천의 참봉 현심목과의 만남은 특히 인상적이다. 84세의 고령에도 중용을 읽으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박래겸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변방의 무식한 지역에 이러한 큰 유학자이자 대가가 있을 줄을 몰랐다."

당시 평안도는 문과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음에도 중앙 관직 진출이 심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과거시험장에서 마주친 젊은 유생들은 이러한 차별의 현실을 토로했다.

전해 듣기로 이번 회시는 '아주 공평했다' 하는데, 괴이한 것은 관서에 있는 생원과 진사 몇몇 사람은 거의 모두가 잘 사는 사람이었으니, 어찌 부자는 글을 잘하고 가난한 이는 글을 잘하지 못하는 것인가?"

박래겸은 이들의 울분을 경청하면서, 부정행위에 가담하는 일부 유생들의 태도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의 기록에는 서북 지역 선비들의 뛰어난 재능과 함께 그들의 한탄과 불만 그리고 때로는 자기비하적 태도까지도 세세히 담겨 있다.

미친 선비와의 만남 또한 강렬하다. 영명사에서 만난 이 사람은 본래 능라도의 양반 자제였으나, 과도한 공부로 정신이 나가 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여전히 주역과 시경을 줄줄 외우는 모습에서 박래겸은 깊은 연민을 느꼈다.

바쁜 공무 중에도 박래겸은 지역의 명승지를 빼놓지 않고 방문했다. 황학루, 부벽루, 연광정 등 유서 깊은 장소들을 찾아 그곳의 역사와 일화를 기록했다. 특히 황해도 곡산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로맨스가 서린 장소들을 둘러보았다. 용봉산은 신덕왕후의 옛집이 있던 곳이었고, 구계에는 왕후가 이성계에게 버들잎을 띄워 보냈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또한 삼십육동천이라 불리는 절경도 찾았는데, 이곳은 참판 엄기가 이름 지은 이래 많은 중국 사신들이 들러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명승지 탐방이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삼등의 한 노인은 동천이 천벌을 받은 뒤에야 백성들이 살 수 있다"고 한탄했다. 명승지를 찾는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었다.

오천여 리 대장정 속 어사출두! 드라마틱한 순간들

서수일기의 매력은 박래겸의 인간적인 면모를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점쟁이를 찾아가 길흉을 묻기도 하고, 젊은 아낙만 있는 집에 묶기가 난처해 빗속을 헤매기도 했다. 때로는 피로에 지쳐 제대로 된 식사조차 못 하는 날도 있었다. 126일 동안 박래겸은 하루 평균 40리약 21km를 이동하며 총 4915리를 달렸다. 이는 경부고속도로의 배에 달하는 거리로, 말을 타거나 걸어서 이동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여정이었다.

서수일기는 단순한 공무 기록이 아니다. 관찰사나 수령이 남긴 공적인 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후기 민초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고위 관리도, 일반 백성도 아닌 암행어사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바라본 당대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조선시대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전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박래겸은 임무 수행 중 총 8회에 걸쳐 어사출두를 했다. 대부분 저물녘에 이루어진 출두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순안현에서의 첫 출두가 특히 인상적이다.

역졸들이 다급한 소리로 어사출두를 외치니 사람들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과 같았다. 온 성의 등불들이 모두 꺼지고 바깥문들은 다 닫혀 있었다."

이런 광경은 암행어사의 위엄을 잘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도 방증한다. 실제로 박래겸은 순안과 개천에서 관청 창고를 봉인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암행어사가 본 조선의 부조리, 그래도 개혁의 희망을 보다

박래겸이 목격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가짜 암행어사의 횡포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그의 일기에는 '암행어사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사칭하거나 '암행어사와 친밀한 사이라고 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공갈 협박해서 돈과 재물을 빼앗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가짜 암행어사의 발호는 조선후기 지방 통치 체계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암행어사가 순행한다는 소문만 돌아도 지방관들이 겁을 먹고 숨어버리는 현실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박래겸의 기록에는 당시 조선의 색다른 풍경도 담겨 있다. 평양성 대동문 근처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상인들이 활발하게 교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성천의 시장에서는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들도 볼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지방 도시의 발전상이다. 평양, 안주, 성천 등 서북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서울 못지않은 번화함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면에는 빈부격차의 심화, 사치 풍조의 만연 등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다.

박래겸은 특히 민생의 어려움을 상세히 기록했다.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는 농민들, 관아의 수탈을 피해 유랑민이 된 사람들, 심지어는 자식을 파는 가족들까지.... 그의 필치는 이러한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한 예로, 순천에서 만난 한 노파는 "관가의 고리대가 너무 높아 일 년 내내 일해도 이자도 못 갚는다"며 한탄했다. 이는 당시 지방관아가 운영하던 환곡제도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증언이다.

그러나 박래겸의 기록이 모두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그는 곳곳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일부 지방관들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향촌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교적 질서와 도덕이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 서북지방의 상공업 발전은 새로운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있었고, 실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중요한 단면이었다.

 

서수일기의 현대적 의미

박래겸의 기록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권력과 부패의 문제, 지역 차별의 문제, 민생의 어려움 등 그가 목격한 많은 문제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더불어 그의 기록은 위정자가 가져야 할 자세도 보여준다. 백성들 속에 직접 들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현장의 실상을 파악하려 했던 그의 태도는 오늘날 관료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된다.

우리가 <서수일기>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민생을 살피는 따뜻한 시선,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는 용기, 그리고 우리 사회의 발전가능성을 발견하는 통찰력이다. 이것이야말로 200년 전 한 암행어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값진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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