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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청년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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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3-16 15:21 조회 82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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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청년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

도세순의 <용사일기 龍蛇日記>

글 신해진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겸 명예교수

도세순의 임진왜란 체험기, 용사일기>

도세순 1574-1653의 본관은 성주, 자는 후재, 호는 암곡이다. 증조부는 동몽교관을 지낸 도균, 조부는 훈도를 지낸 도태보, 부친은 공조참의에 증직된 도몽기, 모친은 이양수의 딸 강양이씨(합천이씨)이다. 도세순은 1754년 성주군 운곡 행정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에서 도몽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게서 수업하였으니, 장현광의 명으로 경산지 편찬에 참여하고 정구의 명으로 천곡서원 창건을 주관한 인물이다.

용사일기는 도세순이 1592413일부터 1595115일까지 그 사이에 약 130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15925월까지의 일들은 비교적 매일 곡진하게 기술하였으나, 이후부터 1595년까지는 매일매일 기록된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쓰여 있다. 그래서 이것들을 혹여 전쟁의 참상을 겪은 단순한 일상의 조각들이겠거니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그 기록은 기억해야만 하고 되새겨야만 하는 역사의 중요한 이면인 셈이다. 이 일기는 도세순의 문집 <암곡일고의 권1에 묶어져 있다.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은 젊은이의 일기라서 전투 현장의 생생함이야 없을지라도 당시 후방에서의 피난살이가 어떠했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왜적의 침입과 살육으로 인한 공포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피난 길에 올라 서로 길이 엇갈려서 가족과 종을 찾아야 하는가 하면, 도적이 들끓어 재산을 모조리 도둑맞기도 하는 등 여느 피난일기와 비슷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개터의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멀리 조상들의 무덤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며 서글프게 장탄식하여 말하기를, "대대로 내려온 집들도 장차 잿더미가 될 것이고 조상의 무덤 자리도 필시 황량한 언덕이 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1592420)

고향을 떠날 생각에 장탄식하는 대목이다. 모진 피난 생활에서도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일과 함께 모친을 여읜 비통함, 어린 동생을 황망히 보내는 애통함 등 또한 기록되어 있는바, 떠났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가 있으니 사뭇 애잔하기만 하다. 그 기록 방식은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기록하며 의론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간 것이 특징이다.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며 지배층의 무능과 부도덕을 신랄하게 풍자하거나 비판하기도 하는 한편, 혼란한 시대의 현실에 관한 근원적 성찰을 모색하며 성리학적 입장에서 인륜 도덕의 확립을 전망하는 방향으로 의론성을 강화한 여헌 장현광의 용사일기 글쓰기 방식과는 전혀 달리한 것이다.


설상가상, 굶주림에 전염병까지 겹친 피난길

당시에 나는 집안의 종친들과 함께 피난하기로 도모하고 별별 논의를 다하였으나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깊은 산은 그곳에 적들이 반드시 병졸들이 숨었을 것으로 의심하여 샅샅이 뒤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지만, 나지막한 산이야 어찌 죄다 찾으려고 하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나지막한 산에 도망가서, 숨었다가 형세를 보아 가며 피난하는 것이 만전을 기하는 계책입니다."라고 하자, 모두 좋다고 하였다. 이윽고 의논하여 결정하였고, 걸수산에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1592413)

이렇듯 왜적의 침략에 따른 극심한 혼란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으니, 나지막한 산에 도망가서 숨었다가 형세를 보아 가며 피난하는 것이 좋겠다는 그럴듯한 주장에 따라 목숨을 건 피난길을 나서기로 한 대목이다. 결국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개터)에서 일가친척 40여 명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는바, 인근의 걸수산 나부산 등 여러 산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문예촌),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야로면,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리(용담),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율곡면 낙민리(두사리), 경상북도 대구 서북쪽의 대현 한티재를 넘어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 등을 전전하며 험난하면서도 처절했던 피난길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용사일기는 피난일기라서 전투장면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 대신 피난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따르는 기근과 전염병에 스러지는 민초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592년 일기의 내용이 피난처를 찾으려는 것이라면, 1593년부터는 굶주림으로 식량을 구하려는 것과 그에 따른 여러 참담한 상황을 담고 있으니, 피난생활이 점점 피폐해졌음을 나타낸다.

5월 증산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항상 이곳에 있었지만, 형은 노복들을 거느리고 운곡을 오가면서 적의 소굴을 엿보아 땅을 일구어 씨를 뿌리기도 하고 곡물을 수확하여 묻기도 하며 운반해 온 양식이 끊이지 않았고 고기반찬 등 부모에게 봉양할 물품 또한 계속해서 찾아 보냈다. 비록 난리 중이라 할지라도 쌓아둔 양식이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한 집안이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사형 도세용이 애쓴 정성 아님이 없었다. (159291)

"자식 된 자의 정이 귀하네요. 이와같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시절에 떡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다니요? 신기하고 신기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배응보는 이전곡을 받으러 옥천에 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기근이 거듭 극에 달하여 굶주려 시체가 들판을 뒤덮고 있어 여우와 살괭이가 먹어 치우고 까마귀와 솔개가 쪼아대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시절의 참혹함이 어찌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사형은 보리 일 때문에 팔계로 갔다. 나는 누이 및 복일 동생과 옛 집터에 남았으나 양식이 떨어져서 풀 열매를 따고 푸성귀를 뜯어 먹으며 근근이 죽지 않고 지냈지만, 복일 동생은 더욱 극도로 기력이 쇠약해졌다. (159468)

한창 보릿고개를 넘고 있던 시기인 음력 4월 중순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보리 수확과 벼농사의 시작을 가로막았으니, 묵은 양식을 비축해 두었던 사족들이야 그나마 조금일망정 버틸 수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엔 먹을 것을 구하고자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노비를 데려갔으나 식량이 모자라자 버리기도 했고, 산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 먹었으나 모자라서 가족들은 피골이 상접했던 것이다. 다른 날의 일기에서 어린 동생은 오랜 굶주림 끝에 우연히 얻은 보리밥을 급히 먹다가 목이 메어 죽는 등 당시의 형편이 매우 곡진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노비들도 굶어 죽고, 또한 도처에서 굶주려 먹거리를 약탈하는 도둑이 밤낮 가리지 않고서 출몰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미 기근으로 인하여 시신들이 들판을 뒤덮고 있으며, 2년간의 대기근이라는 광풍 속에 인육까지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음을 보여준다. 찰방이 시골 마을에서 구석구석 뒤져 곡식을 찾으며 비록 10말을 쌓아둔 것이라도 즉시 가져간다는 소문을 듣자 마을 사람들이 허둥지둥 곡식을 감추거나 숨기니, 도적이 온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1593년 윤116)

15932월 성주에서 왜적이 일시적으로 물러나자 어렵사리 농사를 지은 것인데, 지역 찰방이 직접 마을 구석구석을 뒤지며 곡식을 10말 이상 쌓아 놓은 것이 있으면 징발하려한 것이다. 이는 대구와 칠곡에 주둔해 있던 구원군 명나라 군사를 먹이기 위한 방도였는데, 곡식을 허둥지둥 감추어야 했던 백성들에게는 그 찰방이나 구원군이 도둑이나 왜적과 같은 약탈자임은 매일반이었으리라. 전염병 또한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이른바 재앙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당시 7살이었던 도세순의 어린 동생 복일은 이질에 걸려 핏기 전혀 없이 초췌하여 뼈가 앙상한데도 약을 구하지 못하여 걷지도 못했다. 이날 저녁에 나는 밥상이 들어와 막 먹으려고 하였으나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품과 기지개를 빈번히 하고 한기가 온몸에 퍼지니 이로 인해 앓고 눕게 되었는데, 이것은 얼마 전에 연금이 집에 갔을 때 전염된 병이었다. (15921215) 병세가 점점 중해진 까닭에 부득이 계조모를 모시고 본가로 되돌아와서 10여 일이나 더 앓은 뒤에야 일어났지만, 계조모와 어린 계집종이 잇따라 전염되었다. 이로부터 전염병의 기운이 다시 치성하였다. (15921228)

159210월부터 전염병이 백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도세순도 여종 연금이에게서 옮아 돌림병을 열흘 동안 앓았는데, 계조모와 다른 여종에게까지도 전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과 동네까지도 퍼져가면서 전염병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의 피해는 인명 살상과 재산 파괴로부터 시작되어 사람들을 피난길로 내몰았고, 농삿일마저 불가한 상황이 불러 온 기근에 전염병까지 만연했으니 그 참상이 어떠했는지가 일기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버림받고 내던져진 존재들의 죽음

피난 논의를 했던 것이 413일이었고, 안봉사 뒷산의 산점으로 피난했던 것은 420일이었으며, 증산 문예촌으로 떠난 것은 5월 초순으로 528일에야 도착하였는데, 도세순 집안만 7명의 가족과 노비 13명 가운데 8명이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15명이나 되는 피난 일행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식량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910일 궁여지책으로 도세순은 사내종 봉산과 계집종 볏금을 데리고 외가로 가는 방법을 택하여 식솔을 줄이기도 하였다.

기근이야 어떻게든 버티거나 해결할 수가 있었지만, 질병은 그렇지 못하여 피난생활의 최대 위협 요인이었다. 고향 개터 근처에서 5월 초순에 형 도세옹이 학질에 걸렸고, 증산에서 피난한 지 열흘 만에 7세의 복일이 설사를 하였고, 519일이 되자 "복일은 또 이질에 걸려서 열흘 동안이나 신음하니, 숨이 곧 끊어질 듯해 스스로 걸을 수가 없어서 내가 항상 등에 업고 다녔다"라고 할 정도였으나 이웃에서 얻은 꿀 몇 종지를 받아먹은 이후에 회복할 수 있었다.

질병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전염병이었다. 도세순의 외조모 집에 있었던 윤금이의 어린 두 딸이 전염병에 걸려 피병까지 한 기록이 15921018일에 보인다. 1214일 도세순이 증산에서 부모를 뵙고 주학정 고개를 다시 넘었을 때 다 죽어가는 윤금이를 만났는데, 윤금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지고 있던 양식은 즉시 잃어버리고서 병든 몸을 끌고 촌락의 민가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막대기를 들고 쫓아내니, 길가에 엎어져 넘어진 채로 서리와 눈 위에 있은 지 이미 며칠이 되었습니다. 병든 데다 굶주려서 집으로 돌아갈 힘이 전혀 없었으니, 만약 도랑이나 골짜기에서 죽는다면 누가 저를 위해 뼈를 거두어 묻어주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통곡하였다. 나는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어서 바위 위에 앉아 명복에게 가지고 있던 찰밥을 덜어주어 먹이도록 하니, 명복이가 말하기를, "해가 벌써 서쪽으로 넘어갔고 또 염병에 걸렸을지 의심스러운 사람과 이와같이 오래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윤금이는 결국 상전으로부터 버림받은 데다, 같은 노비인 명복으로부터도 외면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으니, 그곳에서 죽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해, 123일 초계로 오는 도중 전염병에 걸려 9일 증산으로 돌아가다가 쓰러졌으며, 5일 동안이나 겨울 들판에 방치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여종 가음년은 받아오라는 양식을 보자 그대로 가지고 도주하였으며, 굶주림으로 인하여 어매를 팔았고, 명기, 명복, 애정, 수정은 굶주림으로 죽었다. 7명 가운데 5명이 죽은 것이다.

1593611일 자의 일기에 도세순의 모친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어 장례를 치른 일은 차마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여 그의 비통함을 대신하였다. 가족으로서는 첫 사망자였다. 게다가 15946월 복일이 이웃 사람이 준 따뜻한 보리밥을 급히 먹다가 식도가 막혔고, 이 소식을 들은 도세순이 달려갔지만 끝내 숨진 뒤였으니, 가족으로서는 두 번째 사망자였다. 4개월 뒤에는 아버지 도몽기와 동생 예일도 제대로 먹지 못해 죽었다. 가족 7명 가운데 4명이 죽었다. 도세순의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끝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은 것을 보더라도 기근과 전염병은 상전과 노비를 가리지 않았지만, 노비들이 상대적으로 양반이나 양민들보다 더 많이 희생에 노출되었다. 도세순 집안만 보더라도노비 5명이 피난길에 동행하지 못한 것은 버려졌거나 주인집을 지켜야 해서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서 윤금이의 예가 그런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용사일기가 보여주는 곡진한 진정성>

누군가가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하여 전투하느라 수많은 병졸은 희생이 뒤따랐을망정 적과 싸웠다는 미명 아래 그들의 이름이라도 역사가 기억하지만,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이름 없는 민초들의 희생은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목숨까지 빼앗겼어도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질 뿐이다. 이야말로 18세의 도세순이 정녕 고발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전란에 내던져진 연약한 개인들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폭력적 상황 앞에 좌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처절히 극복해 살아남았는지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리라. 이러한 일기가 보여주는 곡진한 진정성은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형상성이라도 그보다 더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고속도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스케치하듯 서술된 역사서의 이면으로 사라져 간 참혹한 역사의 기록으로 소리 없이 큰 울림을 가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런가.


* 덧붙이는 말

2009년 도세순의 14세손 도두호 씨가 <용사일기>를 번역하여 새박출판사를 통해 간행하였다. 10여 차례나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길을 답사하여 당시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을 비교하는 등 자연부락을 상세히 주석한 고인 도두호 씨의 정신, 그 정신에 공감해 동행한 김현철 화가가 작성한 피난지도 4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필자는 2023년 정치한 주석을 보태고 재번역해 출간한 바 있다.

글쓴이 신해진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했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겸 명예교수로 있다

이 자료는 문지회에서 대구은행이 발간한 <향토와 문화 113>에 실린 조선시대 개인일기 중 <용사일기 龍蛇日記>를 발췌하여 만들었습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언제나 마땅히 전 인류의 절절한 이름으로 거부되어야 합니다. 어렵게 세상에 태어나 한 세상 명대로 살지 못하고 전쟁으로 타의에 의해 숨진 지구상의 모든 영혼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전쟁 없는 세상을 선포합니다.(2025-8, 柱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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