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에게 최상의 놀이 매사냥 (김홍도의 그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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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3-20 09:13 조회 10회 댓글 0건본문
<그림1에 대한 설명><귀인응렵(貴人鷹獵)> 단원 김홍도 <그림에서 왼쪽 위의 시는 당나라 왕창령(王昌齡 698⁓756)이 읊은 <관렵(觀獵)>이라는 시이다. “뿔매가 내려앉으니 가을 풀이 성글고, 철총마는 허공을 가르며 나는 듯이 달린다. 소년이 사냥 나가 들토끼 잡아 말 궁둥이 비단에 매고, 의기양양 돌아온다.”
단원 김홍도는 매사냥을 즐겼다. 위 그림은 48세(1792)에 연풍 현감으로 나갔을 때 일이다. 한양에서 30여 년을 바쁘게 그림만 그리다가 40대 후반에 처음으로 한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이때 김홍도가 느꼈을 해방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김홍도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부임하였으니 얼마나 자부심이 컸겠는가. 중인(中人) 신분인 김홍도가 고을 사또로 누렸던 여러 호사 가운데 으뜸은 매사냥이었다. 조선 선비들이 즐겼던 최상의 놀이가 매사냥이었는데 이는 지방 수령 신분이 아니면 좀처럼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김홍도는 내륙에서 가장 산 좋고 물 좋은 단양팔경이 가까이 있는 연풍현에 사또로 나갔으니 남부럽지 않게 매사냥을 즐겼을 것이다. 정조 임금이 김홍도를 다른 곳이 아닌 연풍현으로 보낸 이유는 5년 동안 쉬다 오라는 배려였다. 단양팔경을 오르내리며 사생하고 사냥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다. 하지만 부임 만 3년이 지났을 때 호서위유사 홍대협(洪大協 1750⁓1801)에 의해 탄핵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사냥하느라 군정을 징발했다는 것이다. 1795년 자리에서 물러나고 비변사가 의금부로 하여금 김홍도를 잡아다 엄하게 심문하라는 임금의 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열흘 후 김홍도를 사면하였다. 다음 달인 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화성에서 열렸다. 이 행사 내용을 의궤로 만들기 위해 정리의궤청(整理儀軌廳)이 설치되고 여기에 들어갈 그림은 김홍도가 맡게 되었다. 만약 김홍도가 연풍 현감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검은 사모을 쓰고 푸른색 상의와 흰 하의를 입고 검은 신을 신은 선비가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에는 매 한 마리를 올려놓고 안장에 앉아 있다. 말을 따라오는 동물은 사냥개가 아니라 암사슴이다. 사냥개를 그리지 않은 이유는 김홍도만이 알 일이다. 이 그림에서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점은 왜 관복을 입고 매사냥을 하는가이다. 선비들이 매사냥을 나가면 매를 부리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선비들은 평상시 나들이 복장인, 갓과 도포를 입고 말을 탔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따르는 사람 없이 홀로 매사냥을 나섰다. 김홍도는 고민 끝에 갓 쓰고 도포 입고는 매를 부리지 못하니 관복에 사모를 씌우되 겉옷인 포복을 입히지 않고 안에 입는 상의와 하의만으로 간단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홍도가 누린 여가 생활과 가슴에 품은 자부심을 모두 담았다고 본다.
<그림2.3.4에 대한 설명> 김홍도 필 군선도 병풍 (金弘道 筆 群仙圖 屛風) <김홍도가 그린 유일한 국보>
김홍도 필 군선도 병풍 (金弘道 筆 群仙圖 屛風)의 일부 국보 <김홍도 <군선도> (1776년), 국보 제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서른두 살 때 그린 병풍 그림, 신선이 신선동자를 데리고 서왕모의 생신잔치에 가는 모습을 그렸다> 조선 후기 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도석인물화이다. 도석인물화란 불교나 도교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원래는 8폭의 연결된 병풍 그림이었으나 지금은 8폭이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모두 연결한 상태에서 가로 575.8㎝, 세로 132.8㎝의 크기이며, 그것이 분리된 3개의 족자는 가로 48.8㎝, 세로 28㎝ 내외이다. 종이 바탕에 먹을 주로 사용하고 청색, 갈색, 주홍색 등을 곁들여 채색하였다. 여기서 묘사된 신선들의 명칭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른쪽에 외뿔 소를 타고 도덕경을 들고 있는 노자를 선두로 복숭아를 든 동방삭 등의 신선들과 동자들이 모두 세 무리로 나뉘어 있다. 인물들의 시선과 옷자락이 모두 왼쪽을 향하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갈수록 인물의 수를 점차 줄어들게 하여 화면의 전개와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인물의 윤곽을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묘사한 뒤 얼굴과 손, 물건들은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여 인물들의 표정을 살렸다. 아무런 배경 없이 인물을 나열한 구성과 감정이 살아 있는 듯한 인물들의 묘사, 그리고 얼굴의 둥근 눈매 등은 그의 풍속인물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비록 화본에 따라 그렸으나 호방한 필치로 독특한 인물묘사를 한 작품이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후에 김득신, 이명기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신선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그림 5.6.7.8은 순서대로 기와이기, 무동(보물), 서당(보물), 씨름(보물)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대부분 그가 30대에 그린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그가 34세인 1778년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행려풍속도〉병풍은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을 설명한 평을 써넣었고,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섬세하게 농어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필력과 화면의 짜임새가 미숙한 대로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슴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속에서 흔한 소재로 현장감 있는 배경처리와 함께 회화적으로 이끌어 내려한 김홍도의 의욕이 배어있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은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서당> <타작> <활쏘기> <무동> <길쌈> <씨름> <산수도> <김홍도 자화상 추정> 이 자료는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지킴회에서 탁현규 지음 <조선미술관>과 인터넷을 참고하여 단원 김홍도의 작품세계에 좀 더 접근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2025년-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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