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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고혈 짜 유배지서 호의호식한 조선 사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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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4-05 13:54 조회 2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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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고혈 짜 유배지서 호의호식한 조선 사족들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의 고금유사]

 

임금 진상품 더 거둬 남겨 먹은 봉여

벼슬아치들끼리 물자 공급 부탁한 칭념

권력 움켜쥔 사익공동체, 지금도 똑 같아


사진 설명

<19세기 조선 화가 성협의 화첩 중 양반들이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이문건(1495~1567)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178개월 동안 경상도 성주의 유배지에서 살아야만 했다. 귀양살이라 하지만, 무슨 감방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멀쩡한 집에서 서울에서 살던 것처럼 살았다. 또 조선 시대에 귀양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그가 귀양살이한 것이 무어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문건의 귀양살이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귀양지에서 열심히 쓴 일기 때문이다. 그 일기는 이름하여 묵재일기’(默齋日記).

묵재일기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이문건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한 방법이다. 상당 부분의 물자는 다른 사람의 증여로 채워지고 있다. 예컨대 1563512일 일기를 보자. 이날 호조 판서 오겸은 황모필 4자루, 양털 붓 2자루, 납약 등을 보냈고, 경상도 관찰사 심수경은 봉여’(封餘)라면서 포(, 말린 고기) 2, 말린 꿩 3마리, 붕어 10마리 등을 보냈다.

그런데 이날만 그런 것인가. 아니다. 묵재일기는 이런 물건들의 증여로 흘러넘친다. 판관, 목사, 군수, 현감 등등 지방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이문건에게 무엇인가를 보낸다. 15661월을 예로 들어보자. 12일에는 성주 판관이 미역 1봉을, 3일에는 언양 현감이 생선 7마리와 전복 200마리를, 15일에는 다시 성주 판관이 과일과 밥을, 19일에는 청도 군수가 생밤 2말을, 22일에는 고령 현감이 쌀 1, 27일에는 인동 현감이 말린 꿩 3마리를 보냈다. 이 외에 친지로부터 받은 물건은 쓰기 귀찮을 정도로 많다.

이 벼슬아치들은 자기 개인의 물건을 이문건에게 보낸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상도 관찰사 심수경은 포와 말린 꿩, 붕어를 보냈을 때 봉여라고 말했다. 봉여는 봉상(封上)하고 남은 물건이란 뜻이다. 곧 왕에게 어떤 물건(곧 진상품)을 봉해 올리고 남은 물건이다. 그러니까 심수경은 진상하고 남은 물건이라면서 이문건에게 보낸 것이다. 이문건은 여러 벼슬아치로부터 봉여를 22번이나 받았다. , , 종이, 전복, 문어, 연어, 은어, 홍합 등등 별별 것이 다 있었다.

칭념’(稱念)이란 말도 묵재일기에 자주 보이는데, 본질적으로 봉상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칭념은 원래 불교의 용어다. 부처의 명호(名號)를 읊조리면서 무언가를 염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보통 부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안동 부사로 부임한다고 하자. 나는 그에게 안동에 사는 나의 지인에게 음식 재료나 생활용품을 줄 것을 부탁한다. 때로는 안동에 있는 나의 외거노비가 신공(身貢)을 빼먹지 않고 바치도록 감독해 줄 것을, 또는 달아난 노비를 찾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이런 부탁이 곧 칭념인데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묵재일기에서 칭념의 구체적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1554812일의 일기다. “목사 이사필이 서울 친구들의 칭념 목록을 보내며, 쌀과 콩을 각각 1섬씩 보내왔다.” 여기서 목사는 이문건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성주의 목사다. 서울에 있는 이문건의 친구들이 이사필이 성주 목사로 부임한다는 말을 듣자 그를 찾아가 이문건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물건 목록을 전했고, 이사필은 부임하자 그 목록을 보고 먼저 쌀과 콩을 보냈다. 이런 칭념의 방식으로 무수한 물자가 이문건에게 전해졌다.

묵재일기에는 152회의 칭념이 나온다. 여기에 유희춘(1513~1577)미암일기’(眉巖日記)에 실린 허다한 칭념의 예까지 고려하면 사족사회(士族社會)에서 칭념이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족과 관료들은 봉여와 칭념을 통해 물자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사족이라는 것, 관료가 된다는 것은 국가 권력을 움켜쥔 그들만의 봉여와 칭념의 이익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족과 관료들이 봉여와 칭념으로 건네주고 건네받았던 그 물자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봉여는 백성들로부터 200개나 300개를 거두고 그중 100개만 봉해서 바치고 나머지는 관리들이 나눠 가진 것이었다. 칭념의 물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은 국가 권력을 수단으로 백성이 생산한 것을 수탈한 것이었다.

 

호사스러운 말 뒤에 있는 것

등록 2022-05-20 05:00

 

영천군수로 있던 그는 경상도 감영에 백성들을 구휼할 곡식 1천석을 요청했다. 관찰사 이병모(李秉模)는 선선히 허락했다. 그는 5백석을 실제 백성들의 구휼에 썼고 나머지 5백석은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그런데 빌려준 5백석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5백석을 1천석으로 부풀려 빌려주었던 것이다.

5백석을 어떻게 배로 늘렸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요지는 간명했다. 2석을 갚는 조건으로 1석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 집에 다녀온 뒤 그가 빌려준 곡식을 받으려 하자 백성들은 완강히 버텼다. 1석만 갚겠다는 것이었다. 그와 백성들 사이에 불거진 갈등은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결국은 관찰사에게도 보고되었다. 고민 끝에 휴가를 얻어 다시 서울 집으로 갔다. 임지로 복귀하라는 정조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 병을 핑계 대며 영천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 뒤 그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빌려준 곡식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이라 하였다.

 

희한하게도 그의 아버지 역시 나주 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 환곡 2만 석을 가분(加分)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상도 예천군으로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가분은 규정된 수량을 초과하여 환곡을 대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춘궁기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빌려주는 환곡은 원래 이자가 없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출납 과정에서 곡식이 줄어드는 것을 구실로 모곡(耗穀)’이란 이름의 이자를 받기 시작했다. 모곡은 이내 큰 문제가 된다. 지방관들은 규정을 넘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환곡을 강제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착복했다. 지방관들이 백성을 쥐어짜 제 주머니를 불리는 방법이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게 집안의 내력이었던지 비슷한 일이 그의 숙부에게도 있었다. 그의 숙부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전국적으로 목화 농사가 3년 내리 흉작이었는데 경상도만은 수확할 것이 있었다. 관찰사는 즉각 다른 지방 상인들이 경상도로 들어와 목화를 사 가지고 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 뒤 자기 돈으로 목화를 사들였다. 호남의 솜 값이 폭등했다. 정조는 충주부터 서울까지 장차 옷가지가 없어 추위에도 몸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이 될 것이라고 화를 내었다. 관찰사의 의도는 빤했다. 사들인 목화를 팔아 한몫을 보려는 심산이었다. 정조는 관찰사를 파직했다. 관찰사를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부자인데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다니, 그의 조카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는 누구인가? 홍대용(洪大容)이다. 그의 아버지는 홍역(洪櫟), 숙부는 홍억(洪檍)이다. 홍대용 가문은 정통 노론의 본류로서 이름난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다. 20세기 이후 한국사회가 홍대용이란 이름 앞에 붙인 지전설을 주장한 실학자란 수식어를 벗겨내면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던 홍대용 가문의 실체가 드러난다. 위에서 예시한 관직을 수단으로 백성을 쥐어짜고자 했던 행각은 그 실체의 일부다. 오늘날 한국의 지배계급을 둘러싸고 있는 호사스러운 말을 걷어내면 그 뒤에 무엇이 있을까? 최근 인사청문회를 본 소감이다.

(2022522일 한겨레신문, 주말판 책과 생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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