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공원(중구 달성동)있는 기념비들 - 아동문학가 안 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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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영선 작성일 23-10-20 11:17 조회 96회 댓글 0건본문
대구 달성공원(중구 달성동)있는 기념비들
아동문학가 안 영 선
대구 달성공원(중구 달성동)에는 기념비가 모두 9점(동상1, 헌장비1, 유허비1, 시비1, 기념비2, 예술비2 기타1)이 있는데 기념비는 이상화시비, 어린이헌장비, 달성서씨 유허비와 최재우 동상 외에도 구한말 의병대장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와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팔능거사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 사군자의 대가 죽농 서동균 예술비가 있다
1. 어린이 헌장비
1922년 5월 1일로 제정됐던 어린이날은 1946년부터 5월 5일로 날짜를 바꿔 새로 정했다.1957년 어린이날에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이 선포됐고, 1958년 제36회 어린이 날에 대구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어린이 헌장비를 달성공원 입구에 세웠다. 어린이 헌장 초안을 만든 아동문학가 마해송이 제안했고, 당시 제2군 사령관이던 최영희 장군이 일을 맡았고 대구아동문학회와 언론계가 도왔다. 입구에 세워졌던 어린이 헌장비는 허물어져 1970년 5월 5일 당시 김학수 대구시장이 지금의 서침나무(회나무) 옆에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서 있다.
2. 이상화 시비
대구 출신의 애국시인 이상화의 시비는 달성공원 말터의 높은 곳 코끼리 사육사를 지나 서 있다. 이상화는1901년 4월 5일 대구에서 이시우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43년 3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났다.1947년 수필가 김소운이 '죽순'의 주간이며 편집자인 이윤수를 찾아가 시비 건립을 제안했고, 박목월, 김달진, 이호우, 이영도, 김동사, 오란숙 등 죽순 동인들의 찬성으로 1948년 정월에 건립되었다.
'상화시비' 위쪽의 한자는 죽농 서동균이 썼으며, 본문은 막내 아들 태희의 글씨이다.시비의 뒷글은 김소운이 짓고 민족운동가 33인 중 1인인 위창 오세창이 썼다.시비를 제막하던 날 소복을 한 상화의 옛 연인 송옥경이 먼 곳에서 눈물 짓고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3.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
수운 최제우는 경천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과 도참사상등의 민중사상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하고 '용담가' '안심가' 등의 한글 가사를 지어 포교 활동을 했다.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조정의 주목을 받다1863년 11월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경주 용담정에서 체포되었다.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철종의 국상이 발생하여 1864년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에 41세에 참형되었다.
1907년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되었고 1964년 3월 11일 최제우 순교 100주년 기념 동상건립위원회가 지금의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대구 종로 초등학교에 최제우 나무가있는데 이 나무에 바친 졸시가 있다. 종로초등학교에 있는/ 사백 년 된 회나무/수운 최제우나무//최제우의 처형 명령에/ 잎사귀들이 몸을 짜/ 수액을 떨어뜨렸다// 나무가 울었다/ 하늘도 울었다/ 옥졸들도 따라 울었다/ 보는 사람모두 따라 울었다// 인근의 나무들도/ 같이 흔들렸다니/ 사람보다 나은 나무//
4. 달성 서씨 유허비
달성공원 터는 지방 호족인 달성 서씨 세거지였는데, 달성 터를조선 세종 때군사시설로 조건없이 조정에 양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세운 비이다.돌은 정읍에서 가져오고비석의 글은 시조시인 이은상이 지었으며죽농 서동균이 글을 썼다. 유허비는 달성공원에 있지만 유허비각은 산격동 연암공원의 구암서원 숭현사 옆에 있다. 달성 서씨 유허비는 1971년 3월 22일 달성서씨대종회에서 건립했다.
5.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
의병대장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는 달성공원의 남쪽에 있는데,1962년 10월 3일 왕산허위선생기념사업회에서 새운 비이다.선생은 구한말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정미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 분이다.일제의 사전 봉쇄로 작전은 실패했지만 선생이 진격했던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은1966년 이후 그의 호를 따 왕산로로 불리고 있다.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추서됐다. 선생의 옥사 이후 구미 임은동의 허씨 일족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고 현재 국내를 비롯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선생의 질녀는 시인 이육사의 부인이다.
6. 석주 이상룡선생 구국 기념비
왕산 허위선생비 옆에는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구국 기념비가 있다.선생은 안동 태생으로 청년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사임하고 서간도에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다 1932년 5월 길림성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구국기념사업회에서 1963년 5월 기념비를 세웠다. 경상북도와 대구시가 후원했으며 석주 선생의 제자 이은상이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이 비문의 앞글을 쓰고 제자 종주가 비문의 뒷부분을 썼다.
7.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
달성공원 정면에서 잔디밭을 지나 오른쪽 서침나무 옆에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가 있다.석재 서병오(1862-1935) 선생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많은 제자를 배출한 달성서씨 가문의 대표적인물이다. 달성서씨 대종회에서 1983년 예술비를 세웠다. 선생은 시, 글씨, 그림, 가야금, 장기, 바둑, 의약 등에 능하여 팔능거사라고 불렸다.글씨는 행서, 그림은 사군자에 특히 뛰어났는데 친일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청하자 '당신같이 이름 높은 분은 일본 화가들에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나한테 받으려 하느냐' 며 거절했다고 한다.
8. 죽농 서동균 예술비
서병오 선생예술비의 오른쪽으로 20여미터 쯤에 죽농 서동균 예술비가 있다. 1902년에 태어나 19세 때 석재 선생에게 서화를 배우고 스승의 예술세계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영남의 대표적인 서화가이다.죽농이라는 아호도 스승께서 지어 주셨고, 스승이 작고할 때 당시 35세의 서동균에게 자신의 명정을 쓰게 했다고 한다. 1919년 삼일운동 때 대구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광복 후에는 경북여고, 신명여고등에 재직했으며 1975년 서예부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훈장인 대한민국예술문화상을수상했다.1978년 타계할 때까지석재의 유업인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계승해 후진을 양성했다. 비문의 앞글은 죽농선생의 제자인 동애소효영 선생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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